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루과이 공군 571편 추락사고 (문단 편집) === 생존 === 충돌 직후 생존자들은 부상자들을 위한 구조팀을 결성하였다. 럭비팀 소속 의학도였던 로베르토 카네사와 구스타보 세르비노는 부상자에게 응급처치를 하였다. 충돌 직후 33명이 생존했지만 치명적인 부상으로 인하여 5명이 충돌 다음날 사망했고 8일이 지나 한 명이 추가로 사망하였다. 사망자들을 기내 밖의 눈 속에 묻어 주면서 남은 27명의 생존자들은 식물 하나 없는 눈 덮인 고산지대에서 빈 와인병에 눈을 녹여 물을 마시고 기내에 남아 있던 식량을 끌어모아 나눠먹으면서 버텼다. 생존자들은 기체 꼬리 부분에서 발견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통하여 수색 활동이 진행되었다는 사실과 수색 활동이 중단되었다는 소식을 모두 듣고 있었다. 결국 추락 15일째인 [[1972년]] [[10월 27일]] 생존자들은 생존을 위하여 눈 속에 묻힌 시체의 고기를 잘라내 먹기 시작하였다. 전세기에 타고 있었던 사람은 극소수를 제외하고 모두 긴밀한 관계에 있었던 사이였고 [[식인]]에 대한 터부가 강했던 만큼 이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맨 먼저 먹은 것은 기장인 [[https://www.airlive.net/wp-content/uploads/2017/10/Cap.png|훌리오 세자르 페레다스(Julio César Ferradas. 10월 13일 사망)]] 대령의 시신으로, 생존자들이 이 사고가 조종사 과실이라고 여겨서 만장일치로 그의 시신부터 먹기로 정했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에는 부기장인 단테 엑토르 라과라(Dante Héctor Lagurara. 10월 14일 사망) [[중령]]의 시체를 먹었다. [[1972년]] [[10월 29일]] [[눈사태]]가 덮쳐와 생존자 중 8명이 죽고 19명이 남았다. 이후 구조 요청을 위한 출발을 여러 번 시도하였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 사실 고도 일만 피트의 고산지대에서 고산병, 부상과 굶주림을 안은 채 구조 요청을 위한 하산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추락 후 페어차일드 기의 고도계가 2,000m를 가리키고 있었고 라과라 중령이 죽어가면서 남긴 말[* 최초 추락 후 즉사한 페레다스 대령과 달리 라과라 중령은 살아 있었으나 '쿠리코를 지났다'는 말을 반복해서 했다고 한다. 생존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서 계기판에 깔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던 라과라 중령은 조종석에 권총이 있으니 꺼내서 [[나를 죽여줘|자신을 죽여 달라]]는 부탁을 하였으나 생존자들은 이 요구를 끝내 받아주지 않았는데 [[가톨릭]] 교도였던 생존자들은 자살은 죄이며 그 도움에 손을 대는 것은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을 통해 생존자들은 자신들이 안데스 산맥의 끝자락에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1972년]] [[11월 18일]] 난도 파라도와 로베르토 카네사, 그리고 안토니오 비진텐은 구조 요청을 하기 위하여 비행기 동체를 떠났다. 도중에 식량 부족이 걱정되어 비진텐은 자기 식량을 두 사람에게 건네고 동체로 돌아갔다. 이후 동체에서 라디오를 듣고 있던 생존자들은 재개된 수색에서 생존자들이 여행 가방으로 만든 십자가를 우루과이 공군 C-47이 발견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1972년]] [[12월 11일]] 인육을 먹길 끌까지 거부한 누마 투르카티(Numa Turcatti)가 굶어죽었다. 사망 당시 누마의 몸무게는 '''25kg'''이었을 정도로 처절한 상태였다. 누마는 이 사고로 인한 마지막 사망자가 되었다. [[1972년]] [[12월 20일]] 산봉우리와 능선을 끝없이 걸어 눈 덮인 안데스 산맥의 끝에 다다른 두 사람은 강 건너의 농부 세르히오 카탈란을 조우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결국 동체를 떠난 지 열흘째, 비행기가 떨어진 지 72일째 되는 날 두 사람에 의해 구조 요청은 성공했고 이 성공을 라디오를 통해 생존자들도 알게 되었다. 파라도와 카네사가 구조 요청을 하기 위해 떠난 사이에 3명의 추가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맨 마지막에 사망한 누마 투르카티 이후에는 더 이상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Viven5.jpg]] 앞은 생존자 2명인 파라도와 카네사. 뒤에 모자를 쓴 사람은 첫 발견자인 농부 세르히오 카탈란(1924~2020. Sergio Catalan). 참고로 난도 파라도는 살았지만 웃을 수 없었는데 동승한 어머니 유지니아 돌가이(1922~1972. Eugenia Dolgay)와 여동생 수산나 파라도(1952~1972. Susana Parrado)가 사망했기 때문이다. [[1972년]] [[12월 22일]] 생존 소식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구조 헬리콥터가 띄워졌다.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panic&no=8519|당시 사진]]. 시체 같은 혐오사진은 없고 비행기가 추락한 것이랑 생존자 사진만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